자연재해는 채무불이행자에게 한동안의 휴식을 주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비대면을 강제하는 팬데믹 역병이라면 더욱 그렇다. 코로나 같은 재난은 채무불이행자의 편인 거 같다. 채무불이행자, 시간이 주어질 때 채무탈출의 기회를 모색할 때다.
코로나 같은 자연재해는 채무불이행자의 편
온라인으로 돌아가는 것이 요즘 세상 모습이다. 여기도 코로나 저기도 Covid-19 코비드가 춤을 춘다. 방구석 히키코모리 생활도 적응하니까 할 만하다. 휴대폰을 무음 진동으로 돌려놓으니 여기가 무릉도원 고요 속의 바다이다. 남는 것은 시간뿐이니 인터넷 서핑과 유튜브 알고리즘 추천 동영상 시청에 시간은 나를 비켜간다.
채권추심 채무독촉이 확실히 뜸해졌다. 휴대폰으로 가해지는 채권추심은 휴대폰 모드를 진동으로 바꾸는 순간부터 무력화되었다. 전화통화는 아예 꿈꾸지 못할걸. 문자도 읽씹 하는데 전화를 받을 리가 있겠나. 채권추심 해야 하는 신용관리사 분들도 일할 맛이 안 날 거 같다. 사람이란 동물은 상대방이 들어주고 보아 주고 반응을 해줘야 힘이 나고 더 열심히 하도록 프로그램되어있다. 채권추심사가 일편단심 유구유언 짝사랑의 스토:킹을 해와도 채무자가 시들어 버린 시래기 더미 마냥 무덤덤 목석같이 모른 체 하면 채무 독촉하는 맛 안나는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채무불이행자 찾아가서 꿀밤 한 대 때려주는 것도 불가능하다. 채권 행사자가 자기 성질에 못 이겨 자기목 자기가 조으다가 GPS 제대로 찍지도 않고 채무불이행자 찾아갔다가 코로나 바이러스라도 전달하게 되는 날에는 천하에 역적이 되고 만다.
우리나라 국민들 화풀이 대상 좌표 찍어주면 제대로 밟아주는 한 성질 하는 국민성인 거 다 알제? 마스크 안 쓰고 코로나 감염 가능 반경 내에 접근한 대가로 벌금 300만 원 꽝꽝꽝! 처분을 받게 된다. 상황 파악 못하고 혹 떼려고 도깨비 찾아갔다가 혹 하나 더 붙이고 쫓겨나는 혹+혹부리 영감이 되게 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채권행사자의 편일까 채무불이행자의 편일까? 햄릿이라면 이렇게 읊조렸겠지. "To bo,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예전에 개그콘서트 고집불통에 아파트 경비원으로 나오던 임우일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코로나가 채권행사자의 편인지 채무불이행자의 편인지는 나는 모르겠꼬."
내가 보기에 코로나는 확실히 채무불이행자의 편이다. 그 이유는 채권행사자가 채권추심의 강력한 무기 중 하나를 못쓰게 만들기 때문이다. 채권 행사자의 얼굴을 채무불이행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진도 5.0에 상당하는 강력한 추심압박 수단이다. 천부인권에 버금가는 채권 행사자의 천부채권추심 수단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니 코로나는 채권행사자의 편이 아닌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내편이 아닌 것은 적의 편으로 의제하는 것은 손자병법에도 나온다. 채권행사자의 편이 아닌 코로나 Covid-19는 채무불이행자의 편인 것이다. (부연하면 채무불이행자가 제일 마주하고 싶지 않은 대상 중에 하나가 채권행사자, 채권추심사, 신용관리사 등이다.)
채무불이행자, 재난 속의 잠시 뜸한 추심공백의 자유
그래서 요즘 내 원룸 방구석에서 만큼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코로나가 위세를 떨치는 한은 채무행사자는 채무불이행자인 나를 찾아올 수 없다. 찾아온다고 해도 만남을 거부할 수 있는 합법적이고 3차원적으로 논리 정연한 '코로나 때문에'라는 이유가 있다.
우편물은 등기우편이든 내용증명 우편이든 임팩트가 강하지 않다. 법률에 정하는 불법 채권추심 금지 요건을 지키면서 우편물로 채무불이행자를 깜놀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늘과 세상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제갈공명의 '출사표' 1,2편 정도의 명필이 아니고선 채무불이행자로 하여금 돈을 갚고자하는 불길이 솟아나도록 하는 감동을 전달할 수 없다. 웬만한 필력으로 상대를 감동시키는 글빨을 뿜어내지 못한다면 그런 글은 검고 붉은 잉크로 종이 위에 채권 행사자의 뇌피셜 오피셜 "그건 니 생각이고"를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요즘은 누가 책을 읽나? 채무불이행자도 글 안 읽어려한다. 편지 같은 거 와도 제목만 흘끔 스캔하고 쓰레기 통은 아니지만 거실이나 방구석 어딘가로 내쳐진다. 이렇게 내쳐진 우편물은 언젠가 이사 가는 날에나 이삿짐 다 빠져나간 뒤 뒷정리 청소할 때 먼지 쌓인 쓰레기에 뒤섞여 치워 지게 된다.
앞에서도 씨부렸지만 휴대폰으로 날리는 채권 행사자의 문자 짝사랑 고백에 채무불이행자는 관심 없다. 전화통화는 아는 번호가 아니면 아예 받지도 않을뿐더러 알아도 채권 행사자의 전화는 안 받고 쌩깐다. (요즘 '후스콜', '뭐야이번호?' 같은 어플로 누구한테 걸려온 전화인지 다 캐치되는 것은 다들 알재?) 국민생활, 경제활동 측면에서는 국가적 세계적 불행이지만 채무독촉에 시달리던 채무불이행자 입자에서는 코로나가 고마운 측면이 있는 것이다.
채권 행사자가 코로나에 뜬금 표 집단 따돌림을 당할지라도 채무불이행자는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는다. 코로나가 채권 행사자의 화풀이 대상을 보호해 주는 것도 자연의 일부다. 자연의 순리는 천리이고 천리는 인력으로 어쩔 수 없다. 채권 행사자도 성질이 나겠지만 성질 죽이시고 코로나가 가라앉을 때까지는 돈 받기는 다 글렀다 생각하시고 마음을 넓게 가지시기 바랍니다. 또 압니까? 채무불이행자가 코로나 여파로 방구석에서만 시간 때우는 와중에 별생각 없이 조합한 번호가 로또에 당첨될지. 그렇게 되면 채무불이행자가 불원천리 채권 행사자를 찾아 '감청고소원'이던 돈을 통장에 즉시 출금으로 꽂아 줄지도 모르지 말입니다. 한걸음만 물러서면 이해 못 할 것이 없어요. 채무불이행자 먼저 나고 코로나 났지 코로나 나고 채무불이행자 났겠어요. 채무불이행자도 짬짬이 좋은 시절이 있어야 셀프:di:e 하지 않고 희망 없는 세상에서 버티지요.
그나저나 주가지수는 하늘로 치솟는데 돈 버는 사람은 누군가요. 집도 없고 주식도 없는 채무불이행자는 사촌이 땅을 샀는지 요즘 들어 배가 자주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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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무불이행자, 위기 속에서 세상인심을 깨닫는다
위기 속에서 국가 간 서열이 드러나듯이 코로나 속에서 착한 채권 행사자가 드러나더군요. 대한민국이 코로나 대응에서는 세계 최상위권이지요? 우리나라 의사분, 간호사분, 국민성이 세계 최고 수준인 것이지요. 국민 속에는 채권행사자와 채무불이행자도 들어갑니다.
위기 속에서 나와 사람들 간 관계가 진실을 드러낸답니다. 내가 어려움에 빠져보니까 내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본모습을 알게 되었어요. 마찬 가지로 상대방이 어려움에 빠지고 나면 그 사람에 대한 나의 본모습이 드러난답니다. 10년 지기라느니 소울메이트라느니 말짱 증명되지 않은 버츄얼 relation에 지나지 않는답니다.
내가 채무불이행자가 되고 보니 나의 인간관계 적나라한 모습이 그대로 나타납디다. 가장 가깝게 지내고 가장 자주 밥 먹었던 사람이 5년간 전화 한번 없었답니다. 30년 이상 전화 한번 없었던 고등학교 동창이 혼자 원룸으로 전전하는 나를 수시로 찾고 라면을 박스로 배달시켜주고 한답니다. 아 지금까지 몇 차례 용돈도 줬어요. 진짜 용돈 정도. 지도 지금음 명퇴한 신세인데. 고맙다 친구야.
어릴 때 어른들께서 말씀하시기를 집에 강도가 들면 '강도야!' 외치지 말고 '불이야!' 외쳐야 한다고 들었어요. 강도야!라고 외치면 사람들이 자기 집에 강도 들까 해코지 당할까 무서워 아무도 나와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반면에 불이야!라고 외치면 사람들이 자기 집에 불이 났을까 살피러 전부 집 밖으로 뛰쳐나온다더군요.
'내가 돈 빌리고 못 갚은 채무가 있어. 채무 독촉받고 있어.' 했더니 주변 사람들이 싹 다 숨더라고요. 누가 돈 빌려 달라고 했나. 다들 숨게. 돌 빌려 준대도 안 받는다. 퉤. 아마 '내가 로또 일등에 당첨됐어.' 하고 말했다면 30년 전에 길거리에서 악수 한번 했던 사람까지 그 기억을 들추며 나를 찾아왔을 겁니다. 세상은 그런 겁니다. 내 주변의 지인들이 인생의 동반자가 아닌 것을 깨달을 때 진정한 세상의 인심을 알게 된 답니다. 뭐, 그런 인심을 못 느끼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면 해피한 인생인 거고요.
이 포스팅도 참고 : 채무자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는 신용불량 채무불이행자
자 오늘도 채무독촉 얘기하려고 펜을 들었다가 아니 자판을 꺼내 자세 잡았다 주저리주저리 객줏집 잡소리만 풀었네요. 세상은 허망해도 끝까지 자연 인생까지 완주하도록 노력하려고요. 이참에 괜히 생각나는 시조나 하나 읊고 마무리합니다. 그럼 낼 바~ㅇㅏ요.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년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야은 길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