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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이혼&졸혼 찬성

이혼, 채무, 실업 3종 세트 스펙을 갖추다(2) : 가정은 파괴되고 나는 혼자가 된다

이혼은 뭘까. 삶은 또 뭘까. 인생은 이미 정해진 길을 가고있는 건가. 그저 예측불가의 인생 길이 사후적으로 무작위 브라우닝 모션의 결과인 것인가. 닫힌 공간에서 자유인이던 사람도 열린 공간에서는 주변에 휘둘리는 사람이 되고 마는가. 채권추심에 쫓기고, 실직에 이혼한 인생도 계속 이어갈 의미가 있을까.

 

이혼, 채무, 실업 3종 세트 스펙에 가정은 파괴되고 나는 혼자가 된다

시기의 문제이지 이혼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살던 집 매각을 계기로 이혼 절차도 진행되었다.

부부 싸움 중 내뱉는 상대에 대한 거친 비난은 가정퍄ㅑ괴의 발화를 일으키는 트리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법적 절차가 있으니 기본적인 시간은 소요되지만 이혼을 향해 기어코 루비콘 강을 건넌다.

일순간도 생각하지 않았던 인생행로, 원하지 않던 삶이 예기치 않은 시기에 찾아왔다.

미성년 아이를 가진 부부에게 강제되는 3개월의 숙려기간 만큼 시기가 늦춰질 뿐 이혼은 현실이 되었다.

법원 강의실에서 이혼 후 미성년 자녀에 대한 양육과 관련한 동영상 교육도 받았다.

양육권은 아내에게 있지만 내 제안으로 공동으로 법정후견인이 되기로 하였다. 

사회생활을 좀 더 해온 내가 법정후견인으로 되어있어야 아이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경우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부부 어느 쪽도 아이들을 위해 이혼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재산은 주식과 파생매매로 다 날리고 없으니 재산분할 문제 같은건 없었다.

양육비는 내가 돈이 있으면 당연히 지급할 것이므로 형식적인 요건만 갖추면 되었다.

 

이혼을 하고 난 후에도 같은 공간에 있게되면 부부간 다툼은 여전하다

누구에게 귀책이 있는지 따지는 시기는 이미 지났지만 서로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아이들은 말이 없다.

지나간 세월의 소소한 트러블이 확대경을 통해 보듯이 커 보이고, 잘못된 만남의 결과라고 애써 정당화한다.

집을 팔아 대출금을 정리하려했지만 당연히 모자랐다.

 

25년 쌓은 부부인연은 깨졌다.

결혼으로 맺어졌던 '인연의 친척'인 인척들과는 남이 되었다.

전기가 끊어진 것처럼 처제, 처남, 동서관계는 사라졌다.

버젓이 양부모가 살아있음에도 아이들은 한 부모 가정의 자녀가 되었다.

법의 끈으로 묶여있던 가족관계가 해체된 것이다.

 

이혼을 했으니 내가 나가야 한다.

애들은 엄마와 같이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이들 정서 측면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내가 애들하고 특별히 사이가 나빴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가족 외식을 하였다.

나름 가족 여행도 많이 다녔고 덩달아 전국의 맛 집도 많이 찾아다녔다.

매년 여름 휴가도 빠짐없이 갔으니 웬만큼 추억도 쌓았다.

백과사전 두께의 앨범을 10권 이상 채우는 인화된 사진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이혼이라는 역(逆)인륜지대사에 가족해체로 인생은 난파되었다.

 

처와 아이들이 몸 누일 빌라를 얻어 이사를 하던 날 나는 따로 나왔다.

웬만한 물건은 버리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무슨 짐이 그렇게 많던지 쓸만한 물건을 버리고 또 버렸다.

나중에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아까워할 필요가 없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살 수 없는 물건만 챙기면 된다.

아이들 성장기 이정표 같은 것들은 일단 챙긴다.

그동안 이사할 때마다 내 정신셰계의 기록물처럼 동반했던 많은 내 책들도 다 버렸다.

폐지 끄는 작은 손수레로 4대 분량이었다.

인터넷 중고사이트에서 팔 수 있는 책들이 많았지만 책 무게에 해당하는 폐지 값을 받고 고물상으로 실어 날랐다.

이 시간 이후로 절대 지식을 찾는 공부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므로 아쉬움도 없었다.

학교에서 지식을 배우는 것과 현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깨우쳤기 때문이다.

50대 중반인 지금 가결산해본 인생 손익표가 그것을 증명한다.

내 학창시절 역사물을 파괴한다는 아픈 느낌도 있었지만 미련을 끊기로 했다.

이 시간 이후로 절대 책 지식을 추구하는 공부는 하지 않는다.

인생은 지식 공부에 답이 있지 않다.

다시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책에 눈길을 주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아! 이렇게 하여 50대 중반에 이혼, 채무, 실업의 3종 세트를 스펙으로 갖추게 되었다. 가정은 퍄괴되어 나는 혼자가 되었다.

 

가정이 퍄괴되었으니 다시 혼자서 세상을 헤엄쳐야 한다.

나 홀로 원룸 생활로 접어들었다.

애들 엄마와는 가끔 문자나 전화는 주고 받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뜸해졌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영어 문구가 맞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Out of sight, out of mind."

......

쥭을 것인가 살 것인가 아니 어떻게 쥭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내 인생은 왜 이런가 하는 자책과 함께 쟈샬시도가 거의 매일 꿈속에서 나중에는 현실에서도 이루어졌다.

쟈샬 방법을 검색하고 묙먬, 됵극ㅑ약, 변걔탼, 질소, 튜신 등 각각의 쟈샬 방법을 비교하였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쟈샬기사, 쟈샬 관련 글을 읽었다.

냐일론 끈, 변걔탼 등 쟈샬 물품을 구입하고 나름 유ㅓ연장을 작성하여 항시 휴대하였다.

순간 마음이 움직이면 언제 어디서고 쟈샬하리라 마음먹었다.

 

쟈샬은 절대 실패하면 안되는 인생 마지막 이벤트이다.

쟈샬 실패는 반신불수로 남은 가족과 주변인을 더 불행하게 만든다.

일단 시도하면 반드시 성공하기 위해 일단은 변걔탼을 피워 놓고 뱟쥴로 묙을 먜는 동시적 셸프샬ㅣ인을 생각했다.

구입한 냐일론 끈으로 교슈ㅠ형 매듭법을 눈 감고도 할 수 있도록 반복 연습했다.

한번 실행하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행위이다.

 

인생은 어차피 한 번 왔다가 한 번 가는 거다.

인생은 어차피 고독사다.

수없이 되뇌었다. 일단 실행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나 자신을 정리하는 시간을 계속 가졌다.

부모도 형제도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나마 아이들에 대한 연민이 내 생각의 바구니를 가득 채웠다.

애들을 어찌해야 하나, 애들이 겪을 고생이 파노라마처럼 마음의 뒷벽을 비추며 선명하게 보였다.

 

일단 오늘은 참고 넘기자.

내일도 쟈샬은 가능하다.

이렇게 하루하루 결심을 늦추고 애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반복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 끝의 결론은 아이들한테는 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아이들에게는 심리적으로라도 비빌 언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가야 하는데 어떡하나.

매일 밤을 꼬박 지새우며 인터넷에서 쟈샬 관련 동영상을 검색하고 돌려보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깜빡깜빡 졸다가 순간순간 몸에 전류가 흐르는 느낌의 경기를 일으키며 깨어나기를 밤 낮 구분 없이 반복했다.

전기교뮨을 받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헷갈릴 정도였다.

 

6개월여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결론에 이르렀다.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쥭는다. 일부러 쥭글 필요가 없다. 쥭음은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뤄야 한다.'

지금 당장 무슨 일을 하려고 하지 말자.

지금은 오직 쥭음을 미루는 일만 하자.

그것이면 족하다. 다른 아무 일도 하려고 하지 말자.

 

인생에 무슨 답이 있다고 지금 인생을 결론짓는가.

인생은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다. 답은 없는 것이다.

어떤 인생이 성공한 인생이고 어떤 인생이 실패한 인생이라는 확증편향의 자기 독선이 쟈샬로 이끈다.

인간이 자의적으로 만든 성공과 실패 기준이 절대적일 수는 없다.

그냥 살다가 가는 것이다.

자연 수명대로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존경받을 만한 인생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자위하고 다짐하면서 시간을 흘러 보냈다.

 

아이들을 생각하며 삶아야 할 이유를 찾는다

나를 비빌 언덕으로 생각하는 아이들에게는 나의 존재 자체가 곧 내 삶의 의미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부터 실존하는 삶에 집중하기만 하면 된다.

오직 살아내는 방법에 집중하기만 하면 된 것이다.

일단 샬기로 마음을 먹으니까 지금까지 몸이 경험한 삶과 쥭음 간의 갈등이 수행을 위한 과정인 듯 생각되었다.

 

일찌감치 고교시절 자취생활, 대학시절 하숙 생활, 군대 생활, 결혼 전 독신생활 경험 때문인지 혼자 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먹고 싸고 자는 3가지만 하면 일단 살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 대한 연민과 미안함이 마음을 괴롭혔지만 지금 와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잘 헤쳐가리라 믿기로 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빈손으로 세상살이를 시작한 전철을 물려주는 것이 미안할 뿐이었다.

능력 있는 아빠가 되기는 글렀지만 빚 문제만큼은 해결한 뒤에 가도 가야 한다.

끝내 빚 문제를 해결할 거라 생각하지만 해도 해도 안된다면 마지막에 '한정상속'으로 마무리하리라 생각했다.

아이들이 나를 살리는 건지 내가 아이들의 삶을 지키려 하는 건지 수시로 헷갈렸다.

 

이 즈음부터 체질에 맞지 않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없는 살림에 1천 원짜리 막걸리 한 병이면 한 끼가 해결되었다.

안주는 소금이나 간장을 조금 찍어 먹어도 되었다.

이런 생활에는 금방 적응했다.

스스로 비참하다든가 불쌍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식재료만 있다면 조리를 해 먹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되었지만 지금은 빈 털털이다. 빈 손으로 버텨야 한다.

이러한 삶 자체가 인생 수양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 이후에도 쟈샬 충동이 수시로 일어났지만 지금까지 잘 넘기고 있다.

새로운 인생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까지 나는 되는 일이 별로 없었다.

노력을 했다고 생각한 일도 늘 한고비 앞에서 무너지는 것이 내 운명 같았다.

내가 전생에 무슨 업보를 쌓았기에 내 인생행로가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운이라도 남아 있다면 의외의 시점에 운명의 활로가 뚫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는 한다.

일단 살아 있어야 좋은 날을 볼 수도 있다.

딴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오늘을 살아내는데 집중하기로 다짐한다.

(윤 모 씨의 개인파산 인생극장 이야기 다음 포스팅으로 : (6) 파산 상태의 채무자는 자신의 동물적 본능에서 살 길을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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